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수 전쟁 (문단 편집) === [[을지문덕]]의 방문과 그의 전술에 넘어가다 === 이때 고구려의 재상인 [[을지문덕]]이 수나라 군대와 맞서게 되었다. [[영양왕]]은 [[을지문덕]](乙支文德)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을 하게 하고, [[을지문덕]]은 적중에 들어가 '''직접 염탐을 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나라의 재상씩이나 되는 사람이 직접 정탐이나 하러 적진으로 들어갔던 것 같지는 않고, 아무래도 서로 의사가 타진되었던 상태로 보인다. 수 양제가 [[을지문덕]]이나 [[영양왕]] 둘 중 하나라도 오면 무조건 잡아두라고 한 것을 보면 둘 중의 한 명이 수의 진영으로 찾아온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 [[요동성]]에서 하도 속다 보니 진짜 항복할 생각이 있으면 왕이나 재상 [[을지문덕]]이 직접 찾아 오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을지문덕이 찾아간 것은 정탐이라기보다는 협상을 핑계로 한 시간 끌기 용도로 보는 것이 더 알맞을 것이고, 정탐이라는 것은 중국 측의 면피에 가까운 것일 가능성이 높다. 즉 을지문덕의 행동은 [[청나라]]와의 [[병자호란]] 당시 [[지천 최명길]]이 [[청태종]]과 만나 [[남한산성]] 대피까지 시간벌이를 한 것과 같은 행동이지만, 그렇다 할지언정 매우 용기 있는 행동이다. 항복 의사를 밝힐 듯 말 듯 하면서 협상을 시도하는 척하며 시간을 끌기라면 [[을지문덕]]과 같은 고위층 인사가 방문하는 게 이상하지 않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협상 과정은 마음만 먹으면 밑도 끝도 없이 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전]]에서도 여전히 작용한다.[* 당장 [[6.25 전쟁]]의 [[휴전]] 협상은 [[1951년]] 시작됐으나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고의적인 명령으로 공산권 진영의 협상 조건이 고의적으로 어렵게 제시되었고, '''결국 [[스탈린]]이 죽고 [[게오르기 말렌코프]]가 집권하면서 겨우 휴전 협상이 합의'''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사되었다.] 우중문은 명령대로 을지문덕을 체포하려고 했지만 상서우승 유사룡이 사신을 잡아두는 법은 없다며 반대했다. 유사룡은 이 일로 전쟁 후에 처형된다. 아무튼 [[을지문덕]]이 항복 의사를 밝히고 돌아간 후에 전혀 소식을 전해오지 않자 우중문은 그제서야 속은 것을 눈치채고 평양을 향해 진격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반면 우문술은 이미 병사들의 사기가 꺾였고 을지문덕이 수나라 진영을 염탐하고 돌아갔으니 싸워도 이기기 힘들 것이라 반대하며 급기야 철군까지 주장하였다. 그러나 우중문은 정예 병력으로 공격하면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문술이 그래도 신중론을 펴며 반대하자, 우중문은 벌컥 화를 내며 우문술을 꾸짖었다. 이때 우문술은 우중문의 지휘를 받는 처지라 별 수 없이 명령을 따라야만 했다. 결국 추격전이 벌어졌다. 배고프고 지친 [[수나라]] 군대는 정처없이 [[을지문덕]]을 추격하였고, 적군의 지친 기색을 눈치챈 을지문덕은 이들을 피곤하게 만드려고 싸울 때마다 거짓 패하여 달아났다. 하루에 '''일곱 번을 싸워 일곱 번을 모두 지는''' 일도 있었다. 여기서 지휘한 것은 우문술로 보이는데, 퇴각을 주장하던 그도 계속되는 승리에 생각이 적잖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우문술도 지금은 보급 문제니 뭐니 문제가 많지만 어떻게든 평양성에 도착하면 보급 물자를 충분하게 가진 수군과 합류할 수 있을거고, 그럼 이 문제들도 다 해결될 거라고 믿게 된 모양이다. 결국 페이크에 넘어간 셈. 문제는 이 지연 전술의 효과다. 이 지연 전술 끝에 먼저 평양 인근에 도착한 수의 수군이 조급해진 것이다. 30만의 육군이 도착하지 않자 5만의 전투 병력을 가진 수군이 독자적으로 평양성 공략에 나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